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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아테네 레오나르도 다빈치

by ★§☆#@○ 2024. 2. 21.

아테네

그리스 도시 국가 아테네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극히 예외적인 정치 실험을 한곳으로, 귀족정에서 출발했다.

 

기원전 7세기에 들어서면서 아테네 사회는 온갖 사회 혼란에 직면한다. 인구의 상당수가 채무 노예가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불안했고, 중장 보병의 등장에 따라 평민들의 정치적 요구도 거셌다. 더구나 귀족 킬론이 반란에 실패한 후 정치적인 갈등이 극에 이른다. 이런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기원전 594년 솔론이 단독으로 아르콘에 임명된다. 그는 돈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는 관행을 금지했으며, 외국에 팔려 간 채무 노예의 귀환을 위해 자금도 마련한다. 참정권을 확대했고, 아레오파고스의 결정에 항소할 수 있으며,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도록 사법제도를 개혁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에게 권력과 투표권을 나눠 주려 했기 때문에 이를 금권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솔론의 개혁은 상당 부분 성과가 있었음에도 실패한다. 귀족 계급은 위협을 느꼈고, 평민 계급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론의 개혁이 실패한 후, 아테네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들어선다. 그는 귀족 세력을 억압하는 가운데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평민에게 일자리와 패무 탕감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 솔론이 추진하던 개혁의 상당수를 실현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참주정은 파탄에 이르렀고, 사회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클레이스테네스다. 귀족이던 그는 아테네를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 만들었다. 아테네 민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선거구를 10개로 재조정하여 귀족들의 지역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또 오스트라키스모스를 도입해 해마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야심가들을 추방했다.

 

페리클레스 치세가 되면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절정에 달한다. 이전까지 민회는 여러 사안에 대해 찬반 투표 정도의 역할만 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 법안을 발의 수정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무엇보다 가난한 민중 계급인 테데스에게 정치권력을 개방했다. 민회에 출석하면 일당을 줬고 공직을 담당하면 급여도 줬다. 이를 통해 가난한 민중도 정치 일선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었다. 물론 여성 노예 외국인에게는 이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이탈리아의 미술가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며 동시에 서양 미술사에 가장 저명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당시 피렌체의 저명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당시 피렌체의 저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베로키오의 공방에서 훈련받았다. 그가 남긴 수천장의 자료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치열하게 사유하고 미술적 열정을 발휘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그중 인체에 대한 관심은 특히 유명하다. 30구 이상의 시신을 직접 해부했고, 여성의 몸속 태아에도 관심을 가졌다. 파도와 조류의 법칙, 나무가 커가는 원리 등을 탐구했고, 곤충과 새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직접 비행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색깔이 미치는 대기와 자연의 영향, 음정의 조화 현상 등 각양의 것들을 연구했고, 이는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중에서 예수와 열두 제자의 마지막 식사장면을 그린 최후의 만찬, 피렌체의 한 여성을 그린 모나리자가 유명하다. 모나리자의 경우 스푸마토 기법을 잘 사용해서 눈가와 입술 가장자리를 미묘하게 묘사했고, 적당하게 그려진 그림자가 표정의 모호함을 살렸다. 호사가들은 모나리자의 표정을 두고 여전히 논쟁을 벌이곤 한다.

모나리자는 보는 이의 시선 각도에 따라 인물의 모습이 다채롭게 느껴진다. 배경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고, 옷 주름이 상당히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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