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강의 고등 문명
수천년 전에 목욕탕과 실내 수영장을 사용할 만큼 뛰어난 기술을 자랑했던 인더스 문명의 실체는?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동쪽으로는 고대 아시아의 두 고등 문명이 비옥한 강기슭 지역에서 생겨났다. 기원전 2600년 경부터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인더스 문명이 그리고 대략 1000년쯤 뒤에는 황허 유역에서 고대 중국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더스 문명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문자가 오늘날까지도 해독되지 않아서 인더스 문명에 관한 연구가 발굴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굴된 두 도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건설되었다. 이들은 하수 시설을 갖춘 최초의 도시였으며, 주요 도로들은 남북 방향으로 평행하게 뻗어 있었다. 욕실과 화장실이 있는 집도 있었다. 수도관을 통해 물이 공급되었고 하수는 도시 밑의 배수로로 흘러 나갔다.
인공적으로 만든 높은 지대 위에 세워진 성채가 도시 전체이 모습을 결정했다. 성벽의 안쪽에는 도시 공공시설들이 건설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가로 54미터, 세로 32미터 크기에 난방 시설까지 갖춘 실내 수영장도 있었다. 인더스 문명이 정점에 이른 기원전 2000년경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의 두 도시에 살았던 인구는 4만 명에 육박했다. 그들은 수메르인과 교류했고, 그 밖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다른 민족들과도 교역 활동을 했다. 주요 수출품은 인더스강 계곡에서 최초로 재배, 가공된 면화였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몰락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환경상의 요인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나무를 많이 사용했고 엄청난 산림의 벌채는 이미 당시에도 적잖은 부작용을 초래했던 것이다.
무서운 홍수가 일어나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고대 인더스 문명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아마도 아시아와 유럽의 경제 지역에서 침입해 온 이주민들일 것이다. 이른바 아리안족이라고 불리는 이들 이주민은 수세기에 걸쳐 남쪽으로 이동한 끝에 기원전 1400년경에는 인도 북부에 도달해 원주민들을 복속시켰다. 그후 1000년 동안 새로운 인도 문화와 생활 양식이 발전했으며, 그 자취는 현재 인도의 모습 속에서도 발견된다.
아리안족은 부족 사회의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이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린 계급은 사제였고, 그 다음이 전사였으며, 그 아래 농민이 있었다. 정복된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아리안족의 부족 집단에 속하지 않았지만 곧 농민 속에 섞이게 되었다. 이 다양한 신분집단은 나중에 카스트라고 불렸다. 카스트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세분화되어 이를 테면 수공업자와 같은 새로운 카스트가 추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카스트 사이의 경계는 엄격히 지켜졌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기가 속한 카스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전사는 죽을 때까지 전사로, 농민은 죽을 때 까지 농민으로 살았으며, 이 신분은 자식들에게 세습되었다. 또 이들은 다른 카스트 출신과는 결할 수도, 친분을 맺을 수도 없었다. 인도의 많은 지역에서는 오늘날 까지도 이런 관습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랜 과정을 거쳐서 아리안족과 원주민들이 가졌던 종교적 관념이 힌두교라는 하나의 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힌두교에서 브라마는 창조자이자 최고의 신이고, 비슈누는 보호자이며, 여섯 개의 팔을 가진 시바는 파괴자이다. 힌두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카르마, 즉 윤회 사상으로서, 이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번의 삶을 전전하며, 심지어 전생에서 동물로 살았을 수도 있다. 자신이 속하는 카스트 신분 내에서 모범적인 행동과 덕행을 쌓은 사람은 다음 삶에서는 더 높은 카스트로 태어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 경우에도 카스트 제도에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힌두교에 대한 비판은 왕자로서 호화로운 궁전에서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며 성장한 싯다르타 고타마에 의해 제기되었다. 기원전 560년에 태어난 싯다르타는 삶의 어두운 면을 경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건 왕자의 생활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병들고 늙고 쇠약한 인간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 죽음을 대면했고, 너무나 큰 충격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풍족한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아직도 한창 시절, 검은 머리, 빛나는 얼굴, 행복한 유년을 누리고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에 나는 머리와 수염을 박박 깎고 빛바랜 옷을 걸쳐 입은 채, 통곡하며 우는 부모의 만류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싯다르타는 6년 동안 속세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면서 삶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한 채 신과 인간,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 인간의 고통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온다. 욕망 때문에 번민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며 아무런 욕망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에 도달 할 때 까지 점점 욕망을 줄여 가야 한다. 더 이상 아무런 욕망도 품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은 죽은 후에 환생하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열반 속에서 즉, 무로 소멸 하는 가운데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
한때 왕자였던 싯다르타는 이제 부처, 즉 깨달은 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했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인 불교는 오늘날 흰두교와 더불어 세계의 위대한 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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