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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힘의 안토니우스와 미인 클레오파트라 결합

by ★§☆#@○ 2024. 4. 6.

힘의 안토니우스와 미인 클레오파트라 결합

안토니우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충실한 친구이자 부하로 카이사르 군대 지휘관이자 행정가였다. 원로원으로부터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옥타비 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하였다. 제2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33년 와해되고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불화를 일으켜 두 진영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대패하고 이어서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참패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한 안토니우스의 연인인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도 자살했다. 

 

원래 옥타비아누스는 아테네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하다가 기원전 57년경 시리아의 전직 집정관 가비니우스가 소집한 군대에 들어가 그의 휘하에서 기병대 장교로 복무하였다.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용맹하고 대담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이 원정길에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갔다.

 

기원전 54년경,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지휘 능력으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방탕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종종 카이사와 마찰을 빚었다.

 

카이사르의 호의로 그는 원로원에 들어갔으나 보수적인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관계가 악화되자 원로원에서 추방당해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했다.

카이살의 내전에서 그는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고 전과를 올렸다. 기원전 47년경 안토니우스는 낭비가 너무 심해 시민들의 반감에 몰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카이사르의 다섯 번째 집정관 임기 때 동료 집정관 직에 올랐다.

 

같은 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로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고 그 혼란 중에 안토니우스는 노예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하였다. 다시 로마로 돌아온 그는 카이사르르 변호하여 그의 암살의 부당함을 로마 시민에 설득시키고 여론을 반전시켰다. 

월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군대에 힘입어 카실피나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끝없이 비난하는 키케로 때문에 시달렸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파인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키웠다. 자신의 구역인 동방 속주를 두러부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탈수스(지금의 터키)로 불러 그녀의 반란 혐의를 조사하고 이후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연인으로 함께 지냈다.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 지역에서는 로마의 적대국인 고대이란 왕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이집트의 틀레오파트라와 손잡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상당부분 과장 미화된 점이 없이 않다.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 강화와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품의 지원에 이집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지원으로 예루살렘과 유대를 회복하고 해롯을 왕으로 세우고 다음 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해 들어갔으나 패하고 물러났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한번 이집트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원정에서 돌아와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로마인의 반감을 샀다.

 

그후 기원전 31년 내전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암브라키아만에서 주력 함대를 지휘했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장군 아그라파는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 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드디어 9월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망하고 두 사람은 남아 있는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쳤다.

 

다음 해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와 부대가 이집트에 상육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패배의 절망속에서 자살했다. 며칠 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아들 카이사리온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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